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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cramentum Eucharistiae-Like

2018. 12. 3.

Sacramentum Eucharistiae-Like

 

예수님께서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사도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다.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주는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방식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다.

이 잔은 너희를 위하여 흘리는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루카 복음 22장 19~20절

 

언젠가 너랑 내가 가까워진다면 어떨 거 같아?”

상상이 잘 안 되는데.”

상상하긴 어렵겠지만 말은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코왈스키는 그 뒤에 자신이 한 말이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대답을 하긴 했던가? 했으면 무슨 이야기를 했었나? 추측? 동의? 아니면 부정?


분명히 저런 대화가 오간 것은 사실이다. 그것만은 확실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 바람에 날리는 앞머리가 눈을 가렸다 이마를 드러냈다를 반복했다. 공기는 쌀쌀했지만 그는 셔츠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차라리 추운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따뜻한, 그러니까 사람의 온기 같은 그런 느낌, 코왈스키는 그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온기에 익숙해지도록 할 수 있는 사람은 유독 그에게만은 인색하였으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그는 베란다 난간에 기댄 팔에 힘을 실었다. 아직도 통증이 가시지는 않은 상태였다.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했는데, 그 무엇이 생각나지도 않았고 무슨 생각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르겠는 그런 상태였다.

 

발코니에 혼자 서 있는 걸 추천하진 않는데.”

 

그의 머릿속에서 맴돌던 목소리가 빠져나왔다. 코왈스키는 베일처럼 휘날리는 커튼 뒤를 돌아보았다. 인영은 아직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있으면 누가 왔는지도 모르잖아? 총이라도 들고 있으면 어쩌려고 그래?”

 

그는 커튼을 걷고 차가운 바닥을 디뎠다. 큰 창문을 닫고 커튼을 바깥이 안 보이게 닫았다. 블로홀은 코트를 입고 문 쪽에 서 있었다.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급해서 제대로 보지도 않고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대로 썼나 본데, 네가 쓴 게 내 카드였어.”

왜 왔는데?”

우리 좀 앉을까?”

 

두 사람은 가만히 서 있다가 한쪽 구석에 놓인 테이블로 천천히 걸어갔다. 코왈스키는 한 쪽 팔을 테이블 위에 올렸다. 아직 욱신거리는 상태였다. 블로홀은 자연스럽게 다리를 꼬았다. 그렇게 한참을 서로 다른 걸 보고 있으면서 보냈다. 블로홀은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는 코왈스키의 손을 보았다. 코왈스키는 저 너머 주방 한구석에 있는 와인병에 시선을 향했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다. 한기는 바닥에서 발을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코왈스키는 그런 추측을 해야 하는 침묵이 어색했다.

 

하고 싶은 말 있어?”

우리 계약 말이야.”

 

그건 그가 잊어버리고 있던, 생각해야 할 것이었다. 블로홀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파트 3, 페이즈 2 If. 잊어버리진 않았지? 아니,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 보긴 했나?”


 

+


 

 스키퍼는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전 애인이 다시 찾아왔을 때처럼 심하게 화를 냈다. 그것은 코왈스키도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물론 그렇게까지 화를 내는 건 처음 보는 결과였지만. 어떻게 되었든 가설과 실제 결과는 맞아떨어진 셈이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다가 발을 쿵쿵거리면서 방을 빙빙 돌고는 심한 말을 몇 마디 내뱉고 팔짱을 끼고 코왈스키를 노려보았다. 지금 내 심정으로는 자네를 당장 군사 재판에 내통죄로 세우고 싶네. 재판장은 당연히 유죄 판결을 할 것이고, 그럼 즉결 처분이 가능하겠지. 안 그런가? 코왈스키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제안을 한 사람이 조건이 달린, 강요에 가까운 제안을 건넸다는 것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자신이 왜 그랬는지 확실한 이유는 그 때도, 지금도 알 수는 없었다. 조건을 들키기 싫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그가 갖춘 조건에 마음이 동했던 것인지. 스키퍼는 그를 포기했다. 코왈스키가 자신의 의견을 끝까지 철회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스키퍼도 그의 부관이 그런 식으로 나올 때는 의견을 절대 꺾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협박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스키퍼 특유의 감각은 무슨 더러운 사정이든 뒤에 분명히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결론을 짓고 있었다.

 

 블로홀은 무서운 조건을 맨 앞장에 달아 놓은 것과는 다르게 기지로 찾아온 코왈스키를 와 주어서 정말 기쁘다는 식으로 맞았다. 기지의 문은 쉽게 열렸고, 레이저는 발사되지 않았고, 바닥은 갑자기 튀어나오는 함정 하나 없이 매끈했다. 마치, 굳이 표현하자면, 프라이빗이 깔끔을 떤 다음의 기지 복도처럼. 기지 복도? 그는 왜 거기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코왈스키는 한 발씩 조심스레 내딛으면서도 바닥이 쑥 들어가지나 않을까 걱정을 했지만, 블로홀은 의심의 배합 비율이 절반인 그 신중함을 발견한 다음 걱정도 태산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둘은 기지 제일 안쪽에 있는 블로홀의 연구실까지 아무런 문제없이 도달했다. 자리가 내어졌고, 둘은 배경 설정부터 연구 방안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 시간 정도 의견이 삐걱거리며 조율된 후에 코왈스키는 기지에선 느낄 수 없던 자유로움과 잘 아는 분야에 대한 간만의 전문적인 대화로 그의 대장이 무시무시하게 화를 냈던 것에 대해서는 잊어버릴 수 있었다. 그는 표정을 풀었고, 그걸 놓치지 않은 블로홀도 좋아하는 표시를 내었다. 그는 일어서서 칠판에 지금까지 이야기한 것을 죽 적었다. 코왈스키는 파란색 마카를 들고 추가할 사항을 한 쪽에 적었고, 그림을 그리고 두 사람의 손이 부딪혔을 때 둘은 한바탕 소리내어 웃기도 하였다. 블로홀은 마카를 내려놓고 의자에 다시 기대어 앉으며 말을 꺼냈다.

 

계약서는 완전히 읽어 봤을 거니까 됐고, 그럼 계약을 맺는다는 그런 특정한 식을 거행하는 건 어때?”

? 예를 들면?”

와인을 나눠 마신다던가, 뭐 그런 거.”

와인이 계약이랑 무슨 상관인데?”

무슨 상관이냐고? , 성찬 전례 몰라?”

종교적인 거랑 내가 관련이 없다는 건 너도 잘 알 거 아니야.”

그건 상식인데, 아무튼. 예수가 죽기 전날 빵이랑 포도주로 제자들과 한 식사를 성찬이라고 하지. 그리고 성찬 전례는 미사에서 그걸 재현하는 거고.”

빵이 몸이고 와인이 피다, 뭐 그런 뜻으로?”

그렇지.”

넌 종교와는 인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당연히 없지. 책에서 읽은 지식을 끼워 맞춘 것뿐이야. 가끔 그런 미신스러운 책도 읽어줘야 좀 가볍게 웃음이 나지 않겠어?”

그래, , 한 번 쯤 그런 걸 시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들고 오라 할게. 조금만 기다려 봐. , 그런데 내 방에 가서 해야 할 거야.”

? ?”

미안. 여기에 주방이 없어. 식료품 저장고랑 물 끓이는 큰 솥만 있지. 그래서 다이닝 룸도 없어.”


 거짓말. 하지만 그러면서도 코왈스키는 의심을 표현하지 않았는데, 그건 아마 그의 대장이 추구하던 가치 중 상위권에 위치한 스릴때문이었던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블로홀은 몇 가지를 시켰고, 얼마 후에 가재가 다시 돌아오자 가자며 코왈스키를 이끌었다. 전구와 어둠이 섞인 미로같은 복도를 실험실에 들어올 때보다 한참 더 지나고 나서 둘은 문 하나에 도착했다. 다른 방들과는 다르게 원목으로 된 문이었다. 손잡이를 돌리자 문의 크기에 비해 아주 넓게 보이는 공간이 드러났다. 사실 절대적인 방의 크기 자체가 큰 것은 아니었지만 가구가 몇 없다 보니 방의 어느 위치에서 보아도 답답하지 않고 시원스레 넓은 모양새였다. 한쪽에는 침대가 있었고, 블로홀은 와인병과 잔이 놓인 테이블을 천천히 방의 가운데 쪽으로 끌고 왔다. 코왈스키는 잔을 들었다.


 그리고 둘은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이 밝고, 해가 가장 높은 위치를 지나갈 때까지. 블로홀은 옆에 누운 코왈스키의 팔꿈치 아래를 손으로 슥슥 쓸었다.

 

언젠가 너와 네가,”

 

그는 팔을 타고 내려가 코왈스키의 손을 쥐었다.

 

가까워진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코왈스키는 어깨를 으쓱했다.

 

상상이 잘 안 되는데.”

 

그러면서 그는 블로홀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자신의 손가락을 끼웠다. 블로홀은 피식 웃었다.

 

상상하기는 어렵겠지만, 말은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


 하지만 아무리 언젠가 줄어들지 모르는 거리가 앞에 놓여 있고, 자신의 직업에 충실해도 코왈스키는 자신의 역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기지에 돌아가지 않는 자신을 거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자신을 걱정한 것이 아니라, 돌아갔을 때에 벌어질 일을 걱정한 것이고 그가 없는 기지를 걱정한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그가 없는 그의 대장에 대한 걱정이었다. 블로홀은 코왈스키의 얼굴에 근심이 쌓여가는 걸 잠자코 지켜보고 있었다. 이것은 그가 왈가왈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벗어나도록 하는 것밖에 없었다. 코왈스키는 한편, 이게 정말 옳은 일을 하는 것이 맞는지, 아니 애초에 해도 되는 일이었던 것인지를 걱정하고 있었다. 그는 실험을 하다가도 시험관을 든 채로 머리를 싸매다가 액체를 거의 다 쏟았고, 혼잣말을 하다가 벽에 머리를 대고 한참 서있기도 했고, 블로홀에게 질문으로 시작해서 짜증으로 끝나는 대화를 시도 때도 없이 퍼부었다. 블로홀은 짜증이 치밀었지만 그래도 일단 지켜보았다. 그러다 코왈스키가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날, 블로홀은 더 이상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순 없었다. 제단 위에 스스로 올라간 제물은 더 이상의 희생을 감내할 수 없었고, 그래서 그는 제단에서 뛰쳐나갔다. 코왈스키의 그동안의 히스테리에 가까운 감정 변화는 현실을 차단한 벽을, 그러니까 현실에 압도되어 결국은 몰락해 버리는 것을 막기 위해 세워 놓았던 높은 벽을 조금씩 깨는 일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너머를 절대 무시할 수 없었던 그가 계속해서 두드리고 만져 보고 머리를 박던 그 지점에 마지막으로 귀를 대자 약해진 부분을 타고 저 너머에 만연해 있던 스키퍼의 그림자가 둘 사이에 끼어든 것이었다.

 

,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대장님을 이렇게 저버릴 수는 없어······.”

못 봐주겠네, 진짜. 그만 좀 해. 또 왜 그러는데.”


 코왈스키는 눈가를 짓누르던 자신의 손가락을 얼굴에서 떼었다. 울어서 벌게진 얼굴을 본 블로홀은 다른 어느 때에도 그렇게 짜증이 날 수가 없었다. 그는 말없이 코왈스키를 지나쳐 가서 데스크 한 쪽에 둔 와인병을 잡았다. 술이라도 마셔야 앞에서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있는 코왈스키는 스키퍼의, 그러니까 적이 아니라 계약대로동업자로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을 지나쳐 가는 블로홀의 뒷모습에 대고 코왈스키는 한 마디를 더 했다.


이런 식으로 대장님과 절연을 할 수는 없어.”

여기 어디 절연하겠다는 뜻을 내비친 사람이 있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내가 이런 식으로 계속 멋대로 행동하면 더 이상 날 봐주시지 않을 거야.”

네가 스스로 하는 모든 행동은 스키퍼가 봐 줘야 하는 거야? 이건 네 의사였잖아.”


 코왈스키는 표정이 굳었다. 이건 아니야. 이제 현실은 이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블로홀은 병을 열다 코왈스키를 돌아 보았다. 표정이 볼 만 했다. 도대체 지금까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그럼. 블로홀은 이번에는 또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한 번 들어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병에 손을 댄 채로 코왈스키의 천천히 변하는 표정을 똑바로 보았다. 0아마 3초 후면 목소리를 올릴 것이다. 눈썹을 찡그리면서. 3, 2, 1······.


네가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나를 협박했잖아!”

내가 언제?”

맨 앞 장에 있는 조건이 협박이 아니면 뭔데?”

그게 어떻게 협박이지? 나는 당연히 네가 그걸 택할 줄 알았는데?”

, ? 대체 어떻게 생각을 하면 그런 판단을 내릴 수 있는 건데?”

넌 뭐든지 스키퍼가 허락해야 완전히 시작하잖아!”

 

 이번엔 블로홀의 표정이 바뀌었다. 코왈스키는 순간적으로 당황했다. 그런 말이 블로홀의 입에서 나온 것은 처음이었다. 그는 이제 아까의 자신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에 썼던 병을 자신의 말 때문에 다시 내려놓는 것을 잊었는지 손에 든 채였다.


특히 나랑 관련된 이런, 그러니까, 심기를 거스르는부분에서는! 네 스스로의 의지로 판단하는 걸 멈춘 상태잖아! 그래서 네가 거절하거나 무시했을 때에는 스키퍼한테 내가 이야기한다는 조건을 단 거였어! 어떻게 해서든 스키퍼를 설득하면 넌 자동적으로 설득이 될 테니까! 그렇게 해서 네가 하고 싶은 걸 하게 된다면, 그게 최선의 방법이 아니야? 난 널 위해서 그렇게 한 거야! 그래서, 그 조건 하나 때문에 지금 이 모든 것들도 그렇게 싫었어? 아니지? 내 말이 틀렸어? 틀렸냐고!”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대답해 봐!”


쨍그랑!

 

 병은 블로홀의 손을 떠났다. 고의는 아니었다. 블로홀은 코왈스키가 고려하는 그 대상이 지금 이 모든 뒤틀린 상황의, 코왈스키의 감정의, 자신의 감정의 원인이었다는 걸, 원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걸, 이 모든 것이 사실은 그와 관련이 있었다는 것을 알자 잊어버리고 싶은 과거의 사람이 눈앞에 돌아온 것처럼 흥분했고 그 결과는 갑작스런 상황으로 나타났다. 코왈스키는 얼굴로 날아오는 유리병을 보고 블로홀만큼이나 놀란 표정으로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리려 팔을 올렸고 와인병은 그의 팔에 세게 부딪혔다. 그 자리에 파편이 쏟아졌고 흰 소매 위에 와인이 붉게 번졌다. 그 붉은색에 발효된 포도와 알코올 성분만 포함된 것은 아니었다. 가시처럼 돋친 유리의 파열된 면이 천을 찢으면서 피부에도 자국을 냈고 그 붉은색도 와인과 함께 줄줄 흘렀다. 두 사람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완전히 파악하는 데에는 시간이 걸렸다. 블로홀은 당황해서 입을 벌린 채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고 코왈스키의 눈은 천천히 새파란 빛에서 시퍼런 빛으로 변했다. 더불어서 그의 표정은 이 상황이 벌어지기 한참 전, 그러니까 블로홀의 옆에 있을 때가 아니라 맞은편에 있을 때처럼 무표정하게 바뀌었다. 그건 마치 아무런 색깔도 없이 순수하던 대리석에 검은색과 푸른색 물감을 부어버린 것 같았다. 원래 있던 그 색을 열심히 흰색으로 덧칠하여 지웠는데, 그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한 번의 실수에 가까이 있던 물감 통이 엎질러져 결론적으로는 원래대로 돌아간, 그런 상태. 코왈스키의 그 얼굴은 왠지 모르게 스키퍼를 떠올리게 하였다. 코왈스키는 피가 흐르는 팔을 다른 손으로 잡고 뒤를 돌아 코트를 한쪽 팔에만 걸치고 뛰쳐나갔다. 블로홀은 뒤에서 아직도 병을 쥐고 있었던 손을 든 채로 코왈스키를 불렀지만 그가 서 있던 자리에 남은 건 바닥에 흥건한 와인과 한 때 계약의 증표라고 여겨졌던 유리조각 뿐이었다. 그의 머릿속에 그 와인이 잔에 담겨 있었을 때 입으로 읊었던 구절이 생생하게 울렸다.

 

-

 

 코왈스키는 코트로 다친 팔을 어정쩡하게 가리고 거리를 내달리면서도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제 어떻게 하지?

 그에겐 갈아입을 여벌의 옷도, 상처를 소독할 약도 없었다. 그렇다고 지금 기지로 급하게 돌아가 봤자 자신이 상처를 치료한 다음에는 스키퍼에 의해 얼굴에 다른 상처가 생길 것이 뻔했다. 뛰쳐나온 곳으로 다시 돌아가기는 싫었다. 정신이 하나도 없는 상태로 일단 보이는 가게에 아무데나 들어가 여벌의 셔츠를 사고, 눈에 띄는 호텔에 들어가서 프런트에서 아무 방이나 싱글로 하나를 체크인했다. 구급상자를 부탁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어떻게 방에 올라왔는지도 모르게 부산을 떨며 의자에 앉은 다음 그는 필사적으로 가리려 노력했던 팔을 들었다. 찢어진 천이 피랑 와인이 섞인 액체에 적셔져서 상처에 붙어 있는 게 한숨이 절로 나오는 꼴이었다. 손에도 유리조각이 튄 상처가 여러 개 나 있었다. 우선 핀셋으로 겉에 붙어 있는 유리조각을 떼어 내고 들러붙은 부분을 가위로 잘라 낸 다음 맨살을 천천히 살펴보았다. 길게 베인 게 하나, 그것보단 짧지만 꽤 깊은 상처가 둘, 이리저리 작게 난 스크래치가 셀 수 없을 만큼 여러 개. 상처에 혹시 유리조각이 들어가지는 않았나 살펴 본 다음 주위에 말라붙은 액체를 닦아 내고 상처를 소독했다. 소독약에 닿은 상처는 비명을 질렀고 그의 입에서도 소리가 절로 나왔다. 손을 덜덜 덜면서 붕대를 다 감고 나서 그는 어지러운 탁상을 치울 생각도 하지 않고 침대로 가서 쓰러졌다. 매트리스에 팔이 쓸릴 때마다 통증은 심했지만 알게 모르게 시간은 이미 밤을 넘어선 뒤였고 코왈스키는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바로 잠이 들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난 그는 비척거리며 일어나 예약을 하루 연장했고, 브런치는 건너뛰었다. 하루 종일 누워서 생각만 할 작정이었다. 칼로 찌르는 것 같은 통증은 사그라들었지만 상처는 계속 욱신거렸다. 붕대에 밴 핏자국을 보면서, 코왈스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정말 그 조건을 강요나 협박으로 받아들여서 수락의 표현을 한 것인가?

 

+


 코왈스키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내용인지 내가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읽기는 했어?”

당연히 읽었지.”

그럼 머릿속에 남을 만 한 내용이었을 텐데. 안 읽었잖아.”

내용이 대체 뭐였는데.”

파트 3, 페이즈 2. 상황이 나빠졌을 때. 한 쪽이 돌아섰을 때, 혹은 계약을 깼을 때 사후 처리 방안. 네 부분이 따로 있잖아. 안 읽었지?”

 

코왈스키는 하,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걸 깬 건 너야. 내가 아니야.”

이렇게 된 걸······.”

넌 심지어 나한테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어. 양심이 있으면 먼저 그 이야기를 꺼내야지.”

난 용서를 바라고 온 게 아니야.”

그럼 볼 일이 없겠네. 잘 가.”

이대로 기지로 갈 거야, 그럼? 스키퍼한테는 뭐라고 설명할 건데? 실험하다가 다쳤어요? 불로홀이 그랬어요?”

 

일어서서 발코니로 다시 나가려던 코왈스키는 블로홀의 바뀐 표정을 보고 그대로 앉아 있었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스키퍼가 그 말을 듣고 나한테 강압적으로 찾아오면 내 문제가 되지. 네가 해명을 제대로 못했다는 뜻이고, 내가 그 나머지를 감당해야 한다는 거니까. 너희들의 감정 싸움에 또 휘말리긴 싫어.”

그걸 다 예상하고 있었으면, 애초에 시작을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됐다고 내가 어제도 이야기했을 텐데.”

하지만 그걸 지금 와서 바꿀 수는 없지, 안 그래? 넌 일단 그 상처를 설명해야 하잖아?”

나보고 어떻게 하라는 건데?”


블로홀은 불쌍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오래도록 계속 찾아야 했던 해답을 찾았지. 이건 우리 사이에선 절대 피할 수 없는 거야. 너랑 내가 처음 서로를 알게 된 것도 그 덕분인 점도 있긴 하지만. 너는 네 앞길을 선택을 해야 해. 계속 군인으로 남아 있을 건지, 아니면 네가 그렇게 힘들게 지속해 오던 과학자라는 위치를 계속 가지고 있을 것인지. 이 말은, 정확하게 말하면 지금 상황에서는 이게 그 답이야.

넌 지금 내 인생을 네 멋대로 좌지우지하려 하고 있어.”

내 말이 틀렸어?”

 

 코왈스키는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이건 골치 아픈 문제였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몇십 년간 후회를 하거나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고, 시간을 되돌리면 다시는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가져다 붙일 만할 선택을 내려하 하는 상황이 온 것이다. 그는 언젠가, 그것이 이 계약의 끝에서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런 일이 자신과 블로홀 사이에서 생길 것이라고 예상은 하고 있었다. 어쨌거나 블로홀은 선택을 이미 예전에 내린 사람이고, 같은 처지에 있는 자신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다. 자신은 스키퍼가 블로홀을 다시 찾아가게 되는 일이 생기더라도 기지로 돌아가서 어떻게든 해명을 해 낼 거라는 걸. 하지만 그 이후를 이야기하지 않은 블로홀은 당장 그의 눈앞에 앉아 있었고, 그는 예상하지 못한 결과로 자신 때문에 스키퍼에게 무슨 일이 생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가까워지면 말은 잘 통할 것 같지 않아? 코왈스키는 자기가 그 말에 무슨 대답을 했는지 기억해 냈다.

 

? 선택해. 어떻게 할 거야.”


 그리고 그는 과거의 자신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를 되돌아보면서 고개를 돌렸다.

 

나는······.”

 

I'm not here looking for absolution

'Cause I found myself an old answ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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