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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스킵 눈물

2018. 4. 29.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 아일랜드 속담


 아주 오랜만에 영어로 한 대화는 이곳이 그가 오랫동안 있었던 나라가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노란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무작정 큰 길을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고 하늘을 바라보며 솟아 있는 큰 건물들은 그가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이곳에 왔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의 정보라도 기댈 곳은 필요했고, JFK행 비행기 표는 제값을 치렀다. 그는 한 쇼윈도 앞에 멈춰 서서 얼마전 확 자른 마리를 만지작거렸다. 끝에 컬을 넣은 것이 생각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깨 위쪽을 왔다갔다하는 머리 길이도 어색했지만 그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그 때'와 확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에선 그것이 필요했다.

 건물에 적힌 알파벳 위에 다른 기호가 없는 간판명들을 따라 읽으면서 호텔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첫 번째 건물에 들어갔다. 아무 곳이나 빈 곳에 체크인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맨해튼은 땅값이 비쌌다. 창만 큰 작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좁은 싱글 베드는 작다못해 처량해 보였다. 그는 잠시 캐리어를 들고 특유의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무슨 표현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나고 현관에 자동으로 켜졌던 등이 꺼졌다. 가방을 구석에 밀어 두고 외투를 걸친 채 침대에 앉았다. 푹 꺼지는 매트리스는 용수철이 고장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에 컴플레인을 걸기에는 귀찮았다. 그의 큰 변화 목록에 또 한 가지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통유리로 된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호텔의 저녁 시간 관습인지, 자신이 정신 없는 새에 디너 서비스까지 주문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장을 입은 직원은 카트를 끌고 왔다. 테이블에 얹힌 것은 그가 잘 아는 것이었다. 서툰 발음으로 듣는 그 이름이 새로웠다. 얹은 재료들 위로 빵은 덮여있지 않았다. 웨이터가 나가고 한참 뒤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멍청한 빵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시점인데, 이거.

 꿈속에서는 한 번쯤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요즘들어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는데, 눈물이 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상대방은?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의 원인의 눈가에는 한동안 수분기라고는 없었다. 정확히는 흐르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비가 오는 날 그는 자주 울적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보다는 그 아래 빵 부스러기만해 보이는 차가 기어다니는 차도가 더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잃었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알 수는 없었고 잃어서 생긴 변화만을 따질 수 있었다. 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내가 잘못했을 텐데. 내가 잘못했나? 그것은 상황의 탓이었나, 상황에 휘말린 나의 탓이었나? 오픈 샌드위치는 왜 바닥에서 엉망이 되었나? 그의 상대방에게는 눈물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일련의 단어를 연상하는 것밖에 없었다. 눈물. 흐느껴 울다(sob). 슬픔(soar). s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 미안해(sorry).

 하지만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상황이 어땠든 간에 오픈 샌드위치를 그런 의미로 마음속에 새기게 한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자신은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드리울 때 자신의 스뫼르레브레를 먹을 때의 그가 가장 좋았다는 것이 그의 진심이라고. 물론 스키퍼는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눈물은 흐르지 않고 있으니까.

 그는 스뫼르레브레, 아니 이곳의 말로 오픈 샌드위치 위에 빵을 덮었다. 먹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눈물은 절대 다시 흐를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뉴욕에서는 .구석에 박아둔 캐리어를 뒤져 녹음기를 꺼냈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한스의 녹음일지. 앞으로 오픈 샌드위치는 먹지 말아야겠다. 적어도 혼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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