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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펭/전력

한스스킵 기념일

2018. 5. 13.

한스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매일 버려지는 쓰레기만도 못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젊었을 적에는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없어도 그에게 믿는다는 감정이 있었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사람을 믿는 것처럼 구는 데에 점점 익숙해졌다. 겉으로는. 신뢰를 표현해 낼수록 그의 속에서 믿지 못할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아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다.

 

지난 몇 년은 좀 달랐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동업자의 실력 하나만큼에게는 박수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대였지만 하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시작을 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굳게 믿을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점수를 딴 상대는 한스에게 있어서 여태껏 한 명 밖에 없었다. 다만 그 한 명은 점수가 더 높았기에 한스의 신뢰를 넘어서 사랑 또한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관계를 깬 것은 한스 자신이었으므로, 아직도 그에 대한 신뢰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리라.

 

발렌타인데이만큼이나 그에게 의미가 큰 기념일은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두 개 정도 남았다. 그 중 개인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이 날만이 남아 있었다. 매월 14일마다 이상한 명칭을 가져다 붙인 기념일을 만들어 내어 장사꾼의 천국이 되는 나라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살지 않는 그에게도 대체로 1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달의 14일은 그 의미를 진심으로 기념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항상 고심을 들여 준비하는 붉은 장미꽃다발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눈을 잘게 부수어 장미 주위에 뿌려 놓은 것 같은 안개꽃을 주위에 장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곱게 숨어 있는 카드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분위기를 위해 몇 주 전부터 쓰던 체리향 대신 장미향을 뿌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스는 그의 손에 들린 장미꽃다발만큼이나 올해도 붉게 물들 연인의 얼굴을 생각하고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억 흡입기라고 했나. 아무튼 오늘만큼은 동업자가 하던 과학이라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정확한 시간에 맞춘 손목시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스는 입으로 작게 숫자를 세었다. 3, 2, 1. 12. 방문을 활짝 열었다. 14일로 넘어가는 12시에 딱 맞추어 버튼을 하나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신의 최종 목적이인 저 대서양 건너 해안가의 대도시에도 같은 시간에 전송되기를 바라며 한스는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의 연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짧게 입맞춤을 한 뒤,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이고 꽃다발을 건네준다. 한스가 부르는 자기는 연인의 귓가를 간질이며 얼굴에 기쁨의 웃음을 피어올렸다. 어때, 올해도 마음에 들어? 연인은 한스와 사랑스레 눈을 맞춘다.

 

자네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나는, 자네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사랑하네.”

 

붉은 장미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의 연인은 한스가 기억하던 십 수 년 전 같은 말과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그에게 수줍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한스의 시간과 그의 연인의 것은 지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는 기억이 어떻게 흘러가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한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 스키퍼. 나는 자기를 정말 사랑해.”

 

그들의 로즈데이가 붉게 물들었다. 한 쪽에선 수 년 전의 날이, 한 쪽에선 수 년 후의 날이.

 

-

 

코왈스키는 올해 로즈데이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영상은 올해도 착실하게 14일이 되자마자 날아왔다. 그는 영상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지만 결론은 명백했다. 그의 대장이 다시 곁으로 돌아와 대장의 역할 해 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대장은 이미 그의 부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스키퍼의 시간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의 시점에서 영원히 멈추었다. 코왈스키는 책상 위에 놓아 두었던 포장된 장미 한 송이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혹시 오늘이라도 돌아오신다면 드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의 로즈데이는 올해에도 검게 물들었다.

 

 

 

블로홀박사의 반격 에피에서 스키퍼가 기억 지워졌을 때 덴마크 시절까지 기억만 가지고 한스랑 둘이 잘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써 본 글. 인셉션의 그...맬과 코브의 감정선을 따라서 써 보려고 했는데 너무 가볍게 써져서 슬픕니다ㅠㅠ가볍지만 아주 로맨틱한 글이 되었습니다. 해피 로즈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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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 4. 29.

흐르는 눈물은 괴로우나 그보다 더욱 괴로운 것은 흐르지 않는 눈물이다. 
- 아일랜드 속담


 아주 오랜만에 영어로 한 대화는 이곳이 그가 오랫동안 있었던 나라가 아님을 증명해 주었다. 노란 택시에서 짐을 내리고 무작정 큰 길을 걸었다.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었고 하늘을 바라보며 솟아 있는 큰 건물들은 그가 콘크리트 정글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는 무작정 이곳에 왔지만 아무런 생각 없이 비행기 표를 끊은 것이 아니었다. 한 마디의 정보라도 기댈 곳은 필요했고, JFK행 비행기 표는 제값을 치렀다. 그는 한 쇼윈도 앞에 멈춰 서서 얼마전 확 자른 마리를 만지작거렸다. 끝에 컬을 넣은 것이 생각만큼 마음에 들지 않았고 어깨 위쪽을 왔다갔다하는 머리 길이도 어색했지만 그의 예전 모습을 아는 사람 누구에게라도 '그 때'와 확 달라졌다는 인상을 주기에는 충분했다. 이곳에선 그것이 필요했다.

 건물에 적힌 알파벳 위에 다른 기호가 없는 간판명들을 따라 읽으면서 호텔이라는 글자를 발견한 첫 번째 건물에 들어갔다. 아무 곳이나 빈 곳에 체크인을 하고 방문을 열었다. 그가 잠시 잊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맨해튼은 땅값이 비쌌다. 창만 큰 작은 방에 덩그러니 놓여 있는 좁은 싱글 베드는 작다못해 처량해 보였다. 그는 잠시 캐리어를 들고 특유의 표정으로 한참을 서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드는지, 무슨 표현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지만 문이 저절로 닫히는 소리가 나고 현관에 자동으로 켜졌던 등이 꺼졌다. 가방을 구석에 밀어 두고 외투를 걸친 채 침대에 앉았다. 푹 꺼지는 매트리스는 용수철이 고장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런 것에 컴플레인을 걸기에는 귀찮았다. 그의 큰 변화 목록에 또 한 가지가 추가되는 순간이었다.

한참을 통유리로 된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이 호텔의 저녁 시간 관습인지, 자신이 정신 없는 새에 디너 서비스까지 주문했던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정장을 입은 직원은 카트를 끌고 왔다. 테이블에 얹힌 것은 그가 잘 아는 것이었다. 서툰 발음으로 듣는 그 이름이 새로웠다. 얹은 재료들 위로 빵은 덮여있지 않았다. 웨이터가 나가고 한참 뒤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멍청한 빵 때문이었다.

 눈물이 날 시점인데, 이거.

 꿈속에서는 한 번쯤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요즘들어 자신있게 장담할 수 있는 것은 한 가지 뿐이었는데, 눈물이 난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의 상대방은? 울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울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눈물의 원인의 눈가에는 한동안 수분기라고는 없었다. 정확히는 흐르지 않았던 것뿐이지만. 비가 오는 날 그는 자주 울적해지곤 했는데, 지금은 유리창을 때리는 빗방울보다는 그 아래 빵 부스러기만해 보이는 차가 기어다니는 차도가 더 눈에 들어왔다. 뭔가를 잃었고 그게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알 수는 없었고 잃어서 생긴 변화만을 따질 수 있었다. 왜 눈물이 나지 않는 걸까. 내가 잘못했을 텐데. 내가 잘못했나? 그것은 상황의 탓이었나, 상황에 휘말린 나의 탓이었나? 오픈 샌드위치는 왜 바닥에서 엉망이 되었나? 그의 상대방에게는 눈물이 필요할 터였다.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일련의 단어를 연상하는 것밖에 없었다. 눈물. 흐느껴 울다(sob). 슬픔(soar). s로 시작하는 다른 단어. 미안해(sorry).

 하지만 그는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건 자신의 의도가 아니었다는 것을. 상황이 어땠든 간에 오픈 샌드위치를 그런 의미로 마음속에 새기게 한 것은 절대 고의가 아니었다고. 자신은 아침에 느지막히 일어나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드리울 때 자신의 스뫼르레브레를 먹을 때의 그가 가장 좋았다는 것이 그의 진심이라고. 물론 스키퍼는 믿지 않을 것이다. 자신의 눈물은 흐르지 않고 있으니까.

 그는 스뫼르레브레, 아니 이곳의 말로 오픈 샌드위치 위에 빵을 덮었다. 먹는 일은 없을 것이기에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눈물은 절대 다시 흐를 것 같지 않았다. 적어도 뉴욕에서는 .구석에 박아둔 캐리어를 뒤져 녹음기를 꺼냈다. 시작 버튼을 누르고 나지막히 속삭였다.

"한스의 녹음일지. 앞으로 오픈 샌드위치는 먹지 말아야겠다. 적어도 혼자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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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수고하셨습니다

2017. 2. 11.

뉴욕의 밤은 아름다웠다. 내일이면 다른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어제까지만 해도 춥던 공기가 오늘 하루만큼은 따스하게 녹아들었다. 밤이 되자 바와 레스토랑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환한 조명을 켜 놓았고 간혹 어느 곳에서는 ‘Happy New Year'라고 적힌 종이를 붙이는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인 것도 보였다. 기간이 가까워 아직 남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새해 장식으로 다시 재활용하는 곳도 보였다. 


실내에서도 12 31일을 축하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어느 특공대의 대원들의 기지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졌다. 시작은 연말임무결산이라는 이름 아래에 1년 동안 돌아다닌 임무지와 그간의 브리핑들을 종합한 보고였으나 끝은 다같이 약간의 알코올에 취한 상태였다. 언제나 기지에서의 술자리가 생기면 하듯이 코왈스키가 먼저 깨질 듯 한 머리를 붙잡고 밖으로 나갔고, 조금 있다가 리코와 프라이빗이 잠에 든 것을 보고 이불을 바로 해 준 스키퍼가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둘은 언제나 만나던 곳, 센트럴파크 동물원 정문인 벽돌 문 앞에서 만났다. 코왈스키는 스키퍼를 보고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눈웃음을 지어 보였고 스키퍼 역시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코왈스키와 눈짓을 하였다. 코왈스키는 스키퍼를 한 번 훑어 보더니 자신의 목도리를 풀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손을 꺼내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보며 목도리를 스키퍼의 목 주위에 둘러주었다. 오늘따라 자신에게 신경을 써주는 것 같은-사실 이것은 알코올의 영향으로 인한 잘못된 판단으로 코왈스키는 언제나 그랬었다-코왈스키에 스키퍼는 괜스레 기분이 좋아져서 같이 따뜻한 바에라도 가자고 제안을 하였다. 코왈스키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고, 스키퍼는 주머니의 지갑을 확인하여 보았다.


둘이서 임무가 끝나고 자주 가던 바에 들어서자 웨이터는 고개를 까딱 하며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높은 의자 앞의 테이블은 행복한 새해를 기원하는 글귀와 장식들이 놓여 있어 평소와는 다르게 아기자기한 느낌을 주었다. 스키퍼는 코왈스키의 창백해진 얼굴과 대비되는 빨개진 코끝을 보며 물었다. 내가 뭐라도 마실 것 사 주겠네, 오늘은 12 31일이니까. 뭐 따뜻한 차라도? 코왈스키는 고개를 돌리며 파란 눈을 맞추었다. 그는 어리광을 부리는 듯 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와인이요. 와인 사 주시면 안 돼요? 와인? , 와인이요. 아까 마셨잖아. 그래도...여긴 우리 둘 뿐이잖아요. 그래, 알겠네. 와인 두 잔이요.


와인잔을 들고 서로 잔을 부딪히고,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이제 한 해도 끝이 난다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면, 나이가 한 살이 더 들 것이고 그들의 머리는 함께 더 지혜로워질 것이다.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술을 함께 한 잔으로 마시고, 그 도수가 높아지는 날도 올 것이라고 코왈스키는 생각하고 있었다. 스키퍼는, 내년에는 코왈스키가 잠을 좀 더 많이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말없이 와인을 들이켰다. 그리고 나서 코왈스키는 입을 뗐다.


올해도 수고하셨습니다. 스키퍼의 눈이 동그래졌다. 자네가 먼저 그 말을 꺼낼 줄이야. 내가 먼저 하려고 했는데. 그런가요. 아까 마신 술의 영향인지 코왈스키의 말투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낮아진 목소리와 함께 어쩌면 로맨틱한 포지션을 연출해 내었다. 스키퍼도 같이 말하였다. 자네도 수고했네. 언제나 감사합니다. 나도. 그리고 코왈스키는 고개를 숙였다. 그의 귀가 스키퍼의 어깨에 닿았다. 
사랑합니다, 대장님.
얼마간의 정적이 흘러갔다. 12시가 된 종이 울렸다. 바 안에서 작은 소리가 여러군데서 터져나왔다. 축하의 말들, 사랑의 말들.
나도.
코왈스키는 올해가 가기 전에 사랑한다고 한 번 더 말하였고, 스키퍼는 새해에 처음으로 사랑한다고 말을 해 주었다.
  
-

짧게..소재 라벤님께서 주셨습니다!
12월 31일이군요...
2016년에 함께한 코왈스킵만큼 2017년에도 함께할 수 있길.
내년에도 행복하게 마다가스카의 펭귄을 사랑할 수 있길.
대장님,코왈스키, 리코, 프라이빗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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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2017. 2. 11.

메모를 하는 습관은 좋다는 말이 많이 돌아다닌다. 그에게 있어서 메모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생각난 아이디어를 쓸 때, 기억해야 할 서류가 있을 때, 오늘 해야 할 쌓인 일을 점검할 때, 생각난 수식을 기억하기 위해. 그에게 메모는 사무적인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프라이빗은 책을 읽다가 나름대로 좋은 구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생기면 열심히 노트를 펴 놓고 메모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종이를 낭비하진 않았다. 그것은 기억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자잘하게 가져 온 습관들 중 하나라고 넘겨 왔었기에. 그에게 그가 읽은 책이란 아주 사소한 글자 하나가 아닌 다음에야 대략적인 구조와 인상깊은 부분은 다 기억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사무적이고 차가웠던 메모에 차츰 뜨거운 무엇인가가 적히기 시작할 때. 그가 쓰는 메모지는 늘어 갔다. 그리고 그 뜨거운 메모들은 어딘가로 숨겨져서 고이 보관되어 왔다. 차가운 메모들은 여전히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뜨거운 메모들은 자신만이 보고 낯 뜨거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던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겹쳐지고 그것은 자신을 더욱 작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낯간지러운 사랑 고백을 대놓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오랜 시간 정이 들 대로 들고 볼 면 못 볼 면 다 본 사이에, 엄연한 계급이라는 벽이 존재하는 사이에 사랑을 속삭인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주로 밤에 그런 것들을 썼다. 기분이 좋을 때가 아니라, 기분이 우울할 때. 자기 자신이 한심할 때. 그러나 자신을 누군가는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그런 글들을 썼다. 글은 길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짧게 짧게 멈추었고, 때로는 행이 되고 연이 되기도 하였다. 짧은 여러 편의 연시가 100편이 좀 넘게 쓰여갈 때 쯤 그는 펜을 놓았다. 이렇게 해서 무엇이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기에 나는, 나는 이런 일들을 하는 걸까. 우리고 정말 연인 대 연인으로 마주보고 설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는 괴로웠다. 도대체 나는 왜 사랑을 할까. 그의 앞에는 차가운 메모들 사이에 하나, 뜨거운 메모가 있었다.


난 이미 손 쓸 수 없게 돼버렸지만 
멋대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난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지만 
나는 자꾸만 더 야위고 깊어만 지네 
날카로운 달빛에



https://youtu.be/WvkJJEkO_E8



가사 인용: 루시아-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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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2017. 2. 11.

8 20일 날씨: 95 F˚
시작은 더위였다. 열돔 현상으로 인해서 미국 전체가 폭염으로 찌고 있는 날이었다.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자동응답기가 된 것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게다가 기지의 에어컨은 냉각장치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고장이 나 한 사흘은 기다려야 수리를 할 수 있다는 수리기사의 말에 전화를 하던 프라이빗은 휘청거렸다. 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고 손부채질을 하며 더위의 자라도 꺼내면 그 자리에서 발이 날아갈 짜증스런 얼굴로 더위를 피할 작전을 짜라는 대장님의 특명은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선풍기는 한 사람당 한 대씩 있어도 모자랐다. 내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물놀이였다. 물론 해변에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것이고, 불쾌한 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대장님은 이 아이디어를 적극 찬성했고 물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리코와 프라이빗의 눈은 전에 없던 기세로 반짝였다. 언제, 어떻게 갈 것인지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둘을 보며 대장님은 기분 좋게 웃었고 나는 걱정이 앞선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이 주말이었고 뉴욕은 조용했기 때문에 본부도 조용했다.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깨워서 짐 챙기라는 말은 예상된 것이었다. 리코는 어디서 꺼냈는지 선글라스 네 명분을 각자 가방에 넣어주고 있었고 프라이빗은 썬크림을 너무 많이 발라 얼굴이 허옇게 뜨자 거울을 보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분홍색 리본이 달린, 어딘가에 루나콘이 그려져 있을 모자를 실내에서 쓰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장님은 날 보자마자 커피 좀 타 달라며 텀블러를 내미셨다. 세상에, 아이스커피를 타 달라는 소리잖아. 게 중에서 사복 차림이 아닌 사람은 나 뿐이었다. 대장님은 그걸 보고 그놈의 와이셔츠좀 벗으라고 핀잔까지 주었다. 도대체 다들 얼마나 물놀이에 들뜬 건지. 
아무튼 요절복통을 치르고 도착한 뉴욕 해변은 역시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살끼리 부대낄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금세 파라솔을 펴고 그늘 아래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리코와 프라이빗은 물로 뛰어들었고 나는 이번 달 네이처를 꺼내들었으며 대장님은 선글라스를 끼고 드러누우셨다. 사람은 많았고 우린 전부 각자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았기에 다들 개인적인 환경을 즐겼다. 
그리고 물 만난 펭귄이 되어버려 신이 난 리코와 프라이빗은 장난기가 동했다. 내 머리 위로 물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내 이번 달 네이처...인터넷 구독이 있어 망정이지 이번 달 종이 잡지는 다 젖었다. “으아아아, 리코!” 물론 올려다보니 해맑게 웃고 있는 프라이빗이 물통을 들고 있었지만. 둘은 심심한 모양인지 나한테 어울리길 요구했다. 되도 않는 근거를 가져다 붙이면서 말이다. 프라이빗은 내 손목을 잡고 물놀이를 해서 근육이 좀 붙어야 하는 손목이라고 되도 않는 논리를 들이밀었고 리코는 벌써 다리를 잡아 끌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고 대장님의 선글라스 넘어로 잘해 보라는 눈빛이 날아왔다. 이런. 오늘은 빨리 안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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