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는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믿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일이 다 매일 버려지는 쓰레기만도 못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젊었을 적에는 완전히 신뢰하는 사람은 없어도 그에게 믿는다는 감정이 있었다. 한편 시간이 지날수록 그는 사람을 믿는 것처럼 구는 데에 점점 익숙해졌다. 겉으로는. 신뢰를 표현해 낼수록 그의 속에서 믿지 못할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것을 아는 상대는 한 명도 없었다.
지난 몇 년은 좀 달랐다. 그는 새파랗게 젊은 동업자의 실력 하나만큼에게는 박수를 보낼 수 있게 되었다. 속에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전혀 감을 잡을 수 없는 상대였지만 하는 일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시작을 하고 끝을 맺는다는 것에 대해서는 굳게 믿을 수 있었다. 그 정도의 점수를 딴 상대는 한스에게 있어서 여태껏 한 명 밖에 없었다. 다만 그 한 명은 점수가 더 높았기에 한스의 신뢰를 넘어서 사랑 또한 받을 수 있었다. 물론 관계를 깬 것은 한스 자신이었으므로, 아직도 그에 대한 신뢰를 보장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사실이리라.
발렌타인데이만큼이나 그에게 의미가 큰 기념일은 크리스마스를 제외하고는 두 개 정도 남았다. 그 중 개인적인 것을 제외한다면 이 날만이 남아 있었다. 매월 14일마다 이상한 명칭을 가져다 붙인 기념일을 만들어 내어 장사꾼의 천국이 되는 나라도 있다고 들었다. 하지만 그런 곳에 살지 않는 그에게도 대체로 1년 중 가장 날씨가 좋은 달의 14일은 그 의미를 진심으로 기념할 수 있는 날이었다.
항상 고심을 들여 준비하는 붉은 장미꽃다발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눈을 잘게 부수어 장미 주위에 뿌려 놓은 것 같은 안개꽃을 주위에 장식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물론 그 사이 곱게 숨어 있는 카드에 대해서는 두말하면 입이 아플 정도였다. 분위기를 위해 몇 주 전부터 쓰던 체리향 대신 장미향을 뿌리는 것은 기본이었다. 한스는 그의 손에 들린 장미꽃다발만큼이나 올해도 붉게 물들 연인의 얼굴을 생각하고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기억 흡입기라고 했나. 아무튼 오늘만큼은 동업자가 하던 과학이라는 것에 찬사를 보낸다.
정확한 시간에 맞춘 손목시계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한스는 입으로 작게 숫자를 세었다. 3, 2, 1. 12시. 방문을 활짝 열었다. 14일로 넘어가는 12시에 딱 맞추어 버튼을 하나 누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송신의 최종 목적이인 저 대서양 건너 해안가의 대도시에도 같은 시간에 전송되기를 바라며 한스는 자신을 향해 시선을 돌린 그의 연인에게 미소를 지었다. 가까이 다가가 허리를 굽히고 짧게 입맞춤을 한 뒤, 귓가에 몇 마디 말을 속삭이고 꽃다발을 건네준다. 한스가 부르는 ‘자기’는 연인의 귓가를 간질이며 얼굴에 기쁨의 웃음을 피어올렸다. 어때, 올해도 마음에 들어? 연인은 한스와 사랑스레 눈을 맞춘다.
“자네를 만난 건 정말 행운이야. 나는, 자네를 위해선 무엇이든 할 수 있어. 사랑하네.”
붉은 장미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의 연인은 한스가 기억하던 십 수 년 전 같은 말과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그에게 수줍은 고백을 하고 있었다. 한스의 시간과 그의 연인의 것은 지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지만, 그는 기억이 어떻게 흘러가든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게 좋은 거지. 한스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오, 스키퍼. 나는 자기를 정말 사랑해.”
그들의 로즈데이가 붉게 물들었다. 한 쪽에선 수 년 전의 날이, 한 쪽에선 수 년 후의 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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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키는 올해 로즈데이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영상은 올해도 착실하게 14일이 되자마자 날아왔다. 그는 영상을 보고 아무런 말도 할 수 없는 자신이 싫었지만 결론은 명백했다. 그의 대장이 다시 곁으로 돌아와 대장의 역할 해 내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대장은 이미 그의 부관에 대한 기억이 없었다. 스키퍼의 시간은 미국으로 돌아오기 전의 시점에서 영원히 멈추었다. 코왈스키는 책상 위에 놓아 두었던 포장된 장미 한 송이를 쓰레기통에 넣었다. 혹시 오늘이라도 돌아오신다면 드리려고 했던 것이었다. 그의 로즈데이는 올해에도 검게 물들었다.
블로홀박사의 반격 에피에서 스키퍼가 기억 지워졌을 때 덴마크 시절까지 기억만 가지고 한스랑 둘이 잘 살았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해서 써 본 글. 인셉션의 그...맬과 코브의 감정선을 따라서 써 보려고 했는데 너무 가볍게 써져서 슬픕니다ㅠㅠ가볍지만 아주 로맨틱한 글이 되었습니다. 해피 로즈데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