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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손

2017. 2. 11.

흔히들 손을 보면 그 사람의 인상이 결정되거나 바뀌기도 하고, 그 사람의 성격이나 습관을 알 수 있다고 한다. 손을 보고 그 사람이 하는 일에서부터 성격을 알아맞히는 것은 눈썰미가 좋은 사람의 특성으로 종종 거론되어온 사실이다. 그것은 스키퍼와 코왈스키, 그리고 리코와 프라이빗에게도 적용되는 것이었다. 크게 나누었을 때 험한 일, 몸을 쓰는 일을 선호하는 스키퍼와 리코는 손이 예쁘다기보다는 그들이 노력한 시간과 그 강도를 보여주고, 그 반대인 코왈스키와 프라이빗의 손은 그들이 손을 조심히 다루는 일을 하거나 자신의 손을 조심히 다룬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스키퍼와 코왈스키의 손은 너무 거친 리코의 손이나 아직 청소년의 티를 벗지 못한 프라이빗의 것과는 다르게 보는 사람에게 각자 멋있다거나 아름답다고 느껴질 수 있을 손이었다. 스키퍼의 경우 적당한 햇빛 노출과 다년간의 총기 사용으로 드러난 뼈와 힘줄이 연륜과 노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코왈스키는 타고난 흰 살색에 가는 손가락, 그리고 다년간 펜을 잡은 것의 결과인 드러난 뼈와 혈관이 타고난 것과 후천적인 노력을 뒷받침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두 손은 하루에도 몇 번씩 서로 접촉하고 맞닿는 손이었다. 
  
이거,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건데 잘못된 점 없을까? 좀 봐주겠나?”

그 말에 자신의 서류를 들고 있던 코왈스키는 어깨를 으쓱하고는 옆으로 걸어왔다. 그의 차분한 숨소리가 가까워졌다. 스키퍼의 눈앞에는 서류를 넘기는 코왈스키의 손이 두드러져 보였다. 시계를 찬 손목 위로 길고 흰 손이 종이를 한 장 한 장 넘기고 있었다. 손가락이 얇고 길며, 손톱도 길고 가지런히 잘 정리되어 있는 손이었다. 남자치곤 손이 예쁜 편이고 그만큼 관리를 많이 한 것이 보였다. 스키퍼는 그 옆의 자신의 뭉툭한 엄지손톱을 한 번 쳐다보고는 집게손가락으로 엄지손가락을 가려버렸다.
코왈스키는 서류를 읽으면서 무엇인가를 알아차렸다. 중간에 작전 진행 경위를 설명해야 하는 부분이 조금 부족한 것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자신의 대장에게 이야기하기 위해 눈을 돌렸다. 스키퍼의 시선이 자신의 손 위에 가 있는 것도 볼 수 있었다. 그는 피식 웃고는 스키퍼를 보며 이야기하였다.
  
핸드크림 하나 사다 드릴까요?”
? 아니야, 됐어.”
제 손을 왜 그렇게 유심히 보세요?”
아니, 그냥.”
  
나하곤 비교되는 것 같아서. 그는 조그맣게 이야기했다. 세상에, 천하의 대장님께서 내 손을 보고 열등감을 느끼신단 말이야? 코왈스키는 의외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펴 보았다. 전체적으론 손 관리에 신경 쓰는 여자들 같은 손이었다. 실험 등을 할 때 섬세한 작업을 하기엔 좋았지만 어딘가 남자다움이 드러나지는 않은 손이라 그는 그다지 자신의 손에 만족하고 있진 않았다. 사실 그는 손톱만 잘 정리한다면, 스키퍼의 손이야말로 인정받을 만한 가지치가 있는 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총 쏠 때, 멋있으니까. 그는 달래듯이 말을 이었다.
  
저는 제 손을 좋아하진 않습니다. 실험할 때 편하긴 하지만,”
  
가는 손가락은 남성적인 손가락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살짝 손바닥을 쥐었다.

이렇게, 노력이 드러나는 손이 더 마음에 들어요.”
  
스키퍼의 귀끝이 빨개지는 것은 뒤쪽에 있던 리코도, 프라이빗도 보지 못한 코왈스키만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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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심야에 하는 공포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

2017. 2. 11.

To. 라벤님
생일 축하해요!! 님 제가 많이많이 사랑...해요...우리 앞으로도 잘 지내요...사랑해요...(아련
  
심야에 영화관은 영화의 가격을 내리고 그만큼 먹을거리를 더 많이 팔아 내린 가격만큼의 수익을 창출한다. 그리고 특히 늦은 시간에 영화를 보는 것을 좋아하거나, 사람이 많이 없는 조용한 시간대에 영화를 보고 싶은 사람, 아니면 심야 말고는 영화를 보러 갈 수 있는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늦은 시각 영화관에 모여들었다. 스키퍼와 코왈스키는 맨 마지막 경우에 속하였다. 그들이 뒤쪽에 차고 있는 총에는 아직 피가 마르지 않았고 탄창은 뜨거웠지만 마음은 둘 다 가벼웠다. 오랜만에, 그것도 사람이 북적거리지 않는 조용한 시간에 하는 데이트였으니까. 리코와 프라이빗은 이미 자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코왈스키는 특히 더, 밤을 샐 것처럼 보였지만 생각보다 허술했던 적들이 벌어준 이 시간에 감사하고 있었다. 그의 지갑 속에는 영화표가 고이 접어서 보관되어 있었고 오늘을 위해 긁을 수 있는 신용카드도 있었다. 게다가 영화표에 적힌 제목을 보면 최근 개봉한 영화 같은 가십거리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그 자신이 공포영화를 얼마나 잘 볼 수 있는지 생각할 것이다. 코왈스키는 이럴 때일수록 빛나는 자신의 안목에 속으로 한 번 찬사를 보내고는 스키퍼 옆에서 미소를 지었다.
커피 드실거죠?”
항상 그렇지 않나. 기지에서 타서 왔으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여기 영화관에 있는 카페는 커피 맛이 꽤 괜찮더군요.”
그렇다면 다행이겠군.”
그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서 스키퍼의 커피와 자신이 마실 것을 계산하고는 뒤로 돌았다. 
팝콘도 드실 겁니까?”
우리가 무슨 영화를 보지?”
으음...공포 영화인데요.”
스키퍼의 얼굴에는 순간 당황스러운 표정이 떠올랐다. 물론 태연한 척 하는 그의 습관이 그것을 쉽게 사라지게 만들었지만 눈치 빠른 코왈스키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무서운 영화면...그냥 커피만 마시겠네.”
알겠습니다.”
코왈스키는 음료를 찾으러 일어섰다. 그는 여자 직원이 황홀한 표정으로 건네는 쿠키 두 개도 잊지 않고 챙겨 왔다. 그는 시계를 한 번 확인하고는 들어가야겠다고 말했다. 스키퍼는 커피를 손에 들고 일어섰다. 발걸음에는 누가 쉽게 보지 못하는 초조함이 살짝 묻어 있었다. 자리에 앉아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하는 광고를 보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이 살짝 드러나 있는 것을 코왈스키 같이 예민한 사람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키퍼는 코왈스키에게 몸을 기울이면서 속삭였다.
...많이 무서운가?”
아뇨. 그렇게 잔인하고 갑자기 툭 튀어나오는 그런 건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그 말에 그는 조금 안심이 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는 손잡이에 올려져 있던 코왈스키의 손 위에 살며시 그의 손을 올려놓았다. 코왈스키는 두 번째로, 자신의 안목을 추앙하는 구절을 속으로 읊었다.
영화는 다른 모든 공포 영화처럼 어두운 스크린에 잘 보이지 않는 배경, 그리고 항상 하지 말라는 일을 하는 호기심에 굴복한 젊은 사람들이 나오는 전형적인 영화였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다면 집에 들어간 애들이 잘못된 일을 했고, 집주인은 충분히 화가 날 만 했다는 것. 집주인이 눈이 먼 사람이어서 조용한 가운데 크게 울려퍼지는 작은 소리도 심장을 뛰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영화가 절반 쯤 지나가고 애들이 집주인과의 추격전에 들어갔을 때 코왈스키는 살짝 고개를 돌려 스키퍼를 바라보았다. 영화에 집중하던 스키퍼는 그가 돌아보는 흔적을 눈치채지 못하였다. 그리고 코왈스키는 거의 건드리지 않은 커피와, 과장을 반 섞어서 겁에 질린 토끼같은 눈을 보고는 벌써 세 번째로 자신의 계획에 절을 했다. 거기다가 그의 손은 아직 긴 손 위에 올라가 있었다. 손가락도 조금씩 손을 붙잡는 것처럼 구부러지고 있기도 하였다. 
이제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자신의 얼굴을 붉게 물들이게 하는 일이었으면 더 좋을 거라고 기대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연인을 목적 달성하기에 이용한다고 할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게 서로간의 연애인걸. 내심 기대하던 그는 영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이건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야. 갑자기 하는 것이 더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법이니까. 코왈스키는 아직 자신의 손 위에 올려 져 있는 스키퍼의 손을 힐끗 보고는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영화에서는 이제 애들이 숨기를 멈춘 곳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집주인의 발소리를 들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애들이 덜덜 떨면서 무서워하는 모습도. 집주인이 들고 있는 흉기가 끄는 소리가 조용한 영화 속의 소리, 숨소리까지 죽은 듯 한 영화관 안에 크게 울려 퍼지면서 모든 사람들이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갑자기 집주인의 얼굴이 크게 클로즈업되고 애들이 비명을 질렀다. 거기서 모든 영화관의 사람들이 허억 하고 놀란 소리를 내기도 하였다. 스키퍼의 입에서도 그 소리는 튀어나왔고, 그는 차가운 코왈스키의 손을 꽉 쥐었다. 코왈스키 자신도 놀라 그는 다른 종류의 소리를 지를 뻔 했다.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지만 스키퍼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지는 자신의 손은 정말 기분을 좋게 만들었다. , 정말 내 선택은 탁월했어. 그는 네 번째로 찬양했다. 스키퍼는 코왈스키는 돌아보면서 눈은 놀란 눈에 입은 웃는 이상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마치 지금 너무 놀랐다고, 좀 달래 달라고 하는 것 같았다. 코왈스키는 팔을 뻗었다. 팔에 커피가 걸리지 않게 조심하면서 그의 어깨를 껴안았다. 그리고 스키퍼는 생각보다 더 세게 코왈스키의 어깨를 껴안고 있었다. 그는 고개를 떨구고는 생각했다. 이런 게 공포영화를 보는 맛이지. 정말, 사랑스럽다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 스키퍼는 기지개를 펴며 나왔다. 그는 갑자기 튀어나오는 부분이 없다고 하더니 영화 속에는 있던 것에 대해서 코왈스키를 질책하는 말을 했다. 하지만 그는 웃고 있어서 코왈스키는 그것이 진심어린 질책이 아닌 어리광에 비슷한 종류일 거라고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마음에 드셨냐고 조심스레 물어보았고, 스키퍼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삐딱한 투로 마음에 안 든다고 이야기했다. 코왈스키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그럼 마음에 들게 해 드려야겠네요. 그는 영화를 보면서 달아올라 있는 기분을 이용하기로 했다. 재빨리 대장의 입술 위에 자신의 고개를 숙이고 살짝 가져다 대고는 그대로 눈을 맞추었다. 둘 다 웃고 있는, 예쁜 눈이었다. 카페에서 일하던 여자 점원이 쟁반을 떨어뜨리고 유리잔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코왈스키는 고개를 들고 이제 만족하셨냐고 물어보았다. 스키퍼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의 팔 사이로 팔을 집어 넣어 팔짱을 끼었다. 
바깥 날씨는 차가웠다. 이제 겨울이 온 것처럼, 그들은 아마 코트를 꺼내 입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 둘은 아직 따뜻했다. 서로 걸은 팔짱에 붙어 있는 어깨가 서로에게 체온을 나누어 주고 있었으니까. 조금 만 더 차가웠으면 오늘은 눈이 왔을 거라고 코왈스키는 이야기했다. 스키퍼는 눈이 오는 날 영화를 예매해 놓으라고 명령을 내렸다. 코왈스키는 그것에 동의했다. 알겠습니다. 심야에 보는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를 깨달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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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

2017. 2. 11.

메모를 하는 습관은 좋다는 말이 많이 돌아다닌다. 그에게 있어서 메모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도 했다. 생각난 아이디어를 쓸 때, 기억해야 할 서류가 있을 때, 오늘 해야 할 쌓인 일을 점검할 때, 생각난 수식을 기억하기 위해. 그에게 메모는 사무적인 것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프라이빗은 책을 읽다가 나름대로 좋은 구절, 마음에 드는 구절이 생기면 열심히 노트를 펴 놓고 메모를 하기도 했지만 그는 그런 식으로 종이를 낭비하진 않았다. 그것은 기억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이 자잘하게 가져 온 습관들 중 하나라고 넘겨 왔었기에. 그에게 그가 읽은 책이란 아주 사소한 글자 하나가 아닌 다음에야 대략적인 구조와 인상깊은 부분은 다 기억할 수 있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사무적이고 차가웠던 메모에 차츰 뜨거운 무엇인가가 적히기 시작할 때. 그가 쓰는 메모지는 늘어 갔다. 그리고 그 뜨거운 메모들은 어딘가로 숨겨져서 고이 보관되어 왔다. 차가운 메모들은 여전히 많이 볼 수 있었지만 뜨거운 메모들은 자신만이 보고 낯 뜨거워 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다. 일종의 죄책감이었던 것 같았다.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 이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생각이 겹쳐지고 그것은 자신을 더욱 작게 만들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이 낯간지러운 사랑 고백을 대놓고 할 수 있을까. 그것도 오랜 시간 정이 들 대로 들고 볼 면 못 볼 면 다 본 사이에, 엄연한 계급이라는 벽이 존재하는 사이에 사랑을 속삭인다는 것을 누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는 주로 밤에 그런 것들을 썼다. 기분이 좋을 때가 아니라, 기분이 우울할 때. 자기 자신이 한심할 때. 그러나 자신을 누군가는 위로해줘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 그는 그런 글들을 썼다. 글은 길게 나가는 것이 아니라 짧게 짧게 멈추었고, 때로는 행이 되고 연이 되기도 하였다. 짧은 여러 편의 연시가 100편이 좀 넘게 쓰여갈 때 쯤 그는 펜을 놓았다. 이렇게 해서 무엇이 나아질 수 있을까. 우리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고 있기에 나는, 나는 이런 일들을 하는 걸까. 우리고 정말 연인 대 연인으로 마주보고 설 날이 올 수 있을까. 그는 괴로웠다. 도대체 나는 왜 사랑을 할까. 그의 앞에는 차가운 메모들 사이에 하나, 뜨거운 메모가 있었다.


난 이미 손 쓸 수 없게 돼버렸지만 
멋대로 그대를 원하고 있네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냐 
난 이미 사랑에 빠져 버렸지만 
나는 자꾸만 더 야위고 깊어만 지네 
날카로운 달빛에



https://youtu.be/WvkJJEkO_E8



가사 인용: 루시아-달과 6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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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놀이

2017. 2. 11.

8 20일 날씨: 95 F˚
시작은 더위였다. 열돔 현상으로 인해서 미국 전체가 폭염으로 찌고 있는 날이었다. 일기예보는 하루 종일 자동응답기가 된 것처럼 오늘은 어제보다 더 덥고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울 것이라는 말만 반복했다. 게다가 기지의 에어컨은 냉각장치가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고장이 나 한 사흘은 기다려야 수리를 할 수 있다는 수리기사의 말에 전화를 하던 프라이빗은 휘청거렸다. 셔츠 단추를 서너 개 풀고 손부채질을 하며 더위의 자라도 꺼내면 그 자리에서 발이 날아갈 짜증스런 얼굴로 더위를 피할 작전을 짜라는 대장님의 특명은 나에게 주어진 일이었다. 선풍기는 한 사람당 한 대씩 있어도 모자랐다. 내가 고심 끝에 내린 결론은 물놀이였다. 물론 해변에는 사람이 엄청 많을 것이고, 불쾌한 일도 생길 수 있겠지만. 대장님은 이 아이디어를 적극 찬성했고 물놀이라는 단어가 나오자마자 리코와 프라이빗의 눈은 전에 없던 기세로 반짝였다. 언제, 어떻게 갈 것인지 무엇을 챙겨야 하는지 분주하게 움직이는 둘을 보며 대장님은 기분 좋게 웃었고 나는 걱정이 앞선 웃음을 지었다. 
다음날이 주말이었고 뉴욕은 조용했기 때문에 본부도 조용했다. 따라서 이른 아침부터 깨워서 짐 챙기라는 말은 예상된 것이었다. 리코는 어디서 꺼냈는지 선글라스 네 명분을 각자 가방에 넣어주고 있었고 프라이빗은 썬크림을 너무 많이 발라 얼굴이 허옇게 뜨자 거울을 보고 깔깔거리고 있었다. 머리 위에는 분홍색 리본이 달린, 어딘가에 루나콘이 그려져 있을 모자를 실내에서 쓰고 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대장님은 날 보자마자 커피 좀 타 달라며 텀블러를 내미셨다. 세상에, 아이스커피를 타 달라는 소리잖아. 게 중에서 사복 차림이 아닌 사람은 나 뿐이었다. 대장님은 그걸 보고 그놈의 와이셔츠좀 벗으라고 핀잔까지 주었다. 도대체 다들 얼마나 물놀이에 들뜬 건지. 
아무튼 요절복통을 치르고 도착한 뉴욕 해변은 역시 사람이 많았다. 그래도 살끼리 부대낄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금세 파라솔을 펴고 그늘 아래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잘 알다시피 리코와 프라이빗은 물로 뛰어들었고 나는 이번 달 네이처를 꺼내들었으며 대장님은 선글라스를 끼고 드러누우셨다. 사람은 많았고 우린 전부 각자 자기 앞가림은 할 줄 알았기에 다들 개인적인 환경을 즐겼다. 
그리고 물 만난 펭귄이 되어버려 신이 난 리코와 프라이빗은 장난기가 동했다. 내 머리 위로 물이 한 바가지 쏟아졌다. 내 이번 달 네이처...인터넷 구독이 있어 망정이지 이번 달 종이 잡지는 다 젖었다. “으아아아, 리코!” 물론 올려다보니 해맑게 웃고 있는 프라이빗이 물통을 들고 있었지만. 둘은 심심한 모양인지 나한테 어울리길 요구했다. 되도 않는 근거를 가져다 붙이면서 말이다. 프라이빗은 내 손목을 잡고 물놀이를 해서 근육이 좀 붙어야 하는 손목이라고 되도 않는 논리를 들이밀었고 리코는 벌써 다리를 잡아 끌고 있었다. 한숨이 나오고 대장님의 선글라스 넘어로 잘해 보라는 눈빛이 날아왔다. 이런. 오늘은 빨리 안 끝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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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마

2017. 2. 11.

, 이런.”
짧은 탄식과 함께 그는 오늘 비가 올 것을 예측하지 못한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평소에 매일 틀려 자기가 기상청에 들어갔다면 지금쯤 청장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기 예보는 조만간 장마 전선이 온다는 것 정도는 맞출 수 있나보다. 그는 어제 비가 오지 않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고 우산을 들고 가기에는 불편했으므로 애써 우산을 챙길 필요가 없다고 그의 뇌에 각인을 시키고 간만에 일처리를 하러 본부에 들렀다. 그렇게 빨리 끝날 줄 알았던 보고와 연구팀 체크가 시간을 질질 끌어 저녁 6시까지 온 덕분에 그는 창밖에 쏟아지는 비를 보며 손이 빈 것을 후회해야 했다. 

비가 살짝만 와서 지하철역까지 전력 질주하여 우산을 사서 갈 수 있었더라면 좋았겠건만, 하늘은 그동안 땅의 열기에 더웠는지 엄청난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우산이 있어도 기지에 돌아가 접으면 우산이 축 처질만큼 양이 많아 소리도 듣기 좋은 빗소리가 아닌 양동이 엎는 소리로 창밖을 때리고 있었다. 체면 없게 이런 날 우산도 없이 나갈 수는 없었다. 그는 핸드폰을 들고 한 개인 전화번호부 즐겨찾기에게 전화를 걸려고 했으나 이런 날 나오게 하는 것은 실례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창밖으로 한 사람이 다른 사람 몫의 우산을 들고 현관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다른 사람도 자신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그런 부탁을 할 만큼 대담한 사람이 아니었다. 보통 사람 입장에서 봤을 때 아무렇지 않은 일도 그에게는 대담한 일이었다. 결국 그는 결정했다. 오늘은 밀린 것도 없는 서류 처리, 그리고 앞으로 밀릴 보고서 검토 같은 걸로 밤늦게까지 있다가 비가 그치면 돌아가기로. 그리고 그는 늦게 귀가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했다.

다시금 전화번호부의 즐겨찾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통화음이 얼마 안가 익숙한 벨소리로 바뀌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길지 않았다. 그는 통유리로 된 한쪽 벽에 기대 있다가 고개를 들고는 귀에 들리는 익숙한 벨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젖은 채 비닐에 싸인 우산과 덜 젖은 우산, 이렇게 두 개를 들고 한 손에는 벨이 울리는 전화를 들고 자기를 향해 걸어오는 사람을 보았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 이런.”
그는 이제 기지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코왈스키, 우산 안 챙겨가서 또 늦게까지 서류처리하려고 생각해서 전화한 거 다 아네.”
아니, , , 날씨가 이런데도 굳이 나오셔서......”
또 늦게 들어와서 잠 안온다고 할 게 뻔하잖아. 한 두 번인가?”
..그래도...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나오실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그냥 제가 늦게 들어가면 될 텐데.”
, 일기예보는 이 비가 장마 시작이라던데. 오늘부터 내일, 모레까지 계속 비 이렇게 많이 온다고 했어. 그럼 자네는 3일 뒤에 기지에 들어올 지도 모르지. 얼른 가자.”

그는 자기 우산을 받아 들었다. 천은 조금 젖었지만 손잡이 부분은 아직 손의 온기가 남아서 따뜻했다. 그는 스키퍼와 함께 밖으로 나가고, 지하철을 타고 기지로 돌아갔다. 

앞으로는, 그렇게 긴 우산 말고 접이식 우산 하나 가지고 다니게.”
...그래야겠네요.”
내가 매일 이렇게 나올 수는 없거든. , 그리고 이제 자네도 한 번 예상치 못하게 비가 올 때 날 데리러 와야겠군!”
당연히 그래야죠.”
그는 한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앞으로 비 오는 날에는 항상 당신이 생각날 것 같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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