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는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한 사람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쏟고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이후로 다시는 뜨거워지지 않았고 눈물과 애절함과 같은 감정들도 멈추었다. 그게 끝이었다. 내겐 나를 위한 것들만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없다. 눈동자를 보지 못할수록, 목소리를 듣지 못할수록, 그리고 손끝이 스치지 않을수록 그는 내 머릿속에서 점점 형체만을 남겨갔다. 사람의 기억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색깔과 소리, 그리고 느낌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것들을 나타내는 단어는 충분히 많았다. 단어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떻게 소리 내어야 하는 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것들을 그때처럼 생생하게 전달해 주진 못하였다. 단어들이 이루어져 ‘그’라는 존재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 단어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조합되었지만 그 목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에게 그 조합은 그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게 다가왔다. 자극이 없으니 그 자극을 통한 반응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도저히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펜을 들어 보았고 입을 열어 보았다. 반밖에 쓰지 않은 스킨 병을 열어서 다 날아갈 때까지 방 안을 그 향기로 채운 적도 있었다. 하늘이 회색조로 물들어가는 날 이젠 종이 끝이 구겨진 지도로 차 앞 유리를 덮고 멈춰 있는 차 안에 혼자 앉아 있어 보기도 하였다. 머리로는 이것이 다 쓸모없는 일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망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조막만한 기억을 조금 더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것들을 시도해 보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나는 오히려 더 편해질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그 기억들마저 날아간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거울 앞에 섰다. 이미 일어난 사실을 잊어 보기 위해 며칠을 일만 하였더니 눈 주위는 한참 어두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푸른 빛깔이었다. 그 빛은 내 눈동자의 빛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눈동자의 빛이기도 하였다. 항상 고개를 돌려 마주쳤던 색깔이었다. 한참동안 나는 거울 속의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빛이 비슷할 뿐이었지 그의 눈동자의 색깔이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질 못 하고 있었다. 맺힌 상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이마를 내놓고 표정을 찌푸려 보았다. 그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아주 빈약했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누르지 못하였고 내가 올려다보도록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나와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서 똑바로 응시하게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분위기는 흩어졌다. 진짜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리는 점점 거울에서 멀어졌다. 아직도 거울에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도 나를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상의 모든 것이 변할 때 변하지 않았던 한 가지는 그와 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빛이었다.
그와 함께 파랗다는 단어가 부서져 내렸다. 그 파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우울이라는 단어였다. 가라앉은 어감은 속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었다. 그 빛깔을, 그 색깔을 바라볼수록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날카로움도 커져 갔다. 닫힌 창가의 수국 디퓨저의 향은 어느새 방 안에 가득했다. 색깔과 향기가 점점 나를 감쌌다. 그렇게 잊었던 감촉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 했다. 입술 위에 겹쳐졌던 다른 입술, 그리고 목에 가 있던 손가락. 감각이 살을 타고 돌아왔다. 그는 나에게 스킨이냐고 물어 보았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는 그러냐고 대답했다. 손을 뻗었다. 막대를 타고 얹힌 수국은 그 자리에 있었다. 손가락에 향기가 묻어 나왔다. 어느새 얼굴을 감싼 손은 눈앞을 깜깜하게 하였다. 그리고 난 마침내 머릿속에 그 때의 그를 그려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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