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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Blue

2017. 6. 17.

 다시는 그 시절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한 사람을 위해서 내 모든 것을 쏟고 내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는 일은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그 때 이후로 다시는 뜨거워지지 않았고 눈물과 애절함과 같은 감정들도 멈추었다. 그게 끝이었다. 내겐 나를 위한 것들만 남아 있었다. 그는 지금 없다. 눈동자를 보지 못할수록, 목소리를 듣지 못할수록, 그리고 손끝이 스치지 않을수록 그는 내 머릿속에서 점점 형체만을 남겨갔다. 사람의 기억이 그 정도밖에 안 된다는 것이 나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색깔과 소리, 그리고 느낌을 설명할 수는 있었다. 그것들을 나타내는 단어는 충분히 많았다. 단어들을 어떻게 조합하고 어떻게 소리 내어야 하는 지도 다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그것들을 그때처럼 생생하게 전달해 주진 못하였다. 단어들이 이루어져 라는 존재를 만들어내지 못하였다. 그 단어들은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조합되었지만 그 목적은 어느새 사라지고 나에게 그 조합은 그저 단어들의 나열에 불과하게 다가왔다. 자극이 없으니 그 자극을 통한 반응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도저히 그것을 참을 수 없을 때 펜을 들어 보았고 입을 열어 보았다. 반밖에 쓰지 않은 스킨 병을 열어서 다 날아갈 때까지 방 안을 그 향기로 채운 적도 있었다. 하늘이 회색조로 물들어가는 날 이젠 종이 끝이 구겨진 지도로 차 앞 유리를 덮고 멈춰 있는 차 안에 혼자 앉아 있어 보기도 하였다. 머리로는 이것이 다 쓸모없는 일인 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망각이 진행 중이기 때문에 이것들은 조막만한 기억을 조금 더 유지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았다. 차라리 이런 것들을 시도해 보는 시간에 해야 할 일을 한다면 나는 오히려 더 편해질 지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 남아 있는 그 기억들마저 날아간다면 나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거울 앞에 섰다. 이미 일어난 사실을 잊어 보기 위해 며칠을 일만 하였더니 눈 주위는 한참 어두워져 있었다. 그 사이로 눈동자가 보였다. 푸른 빛깔이었다. 그 빛은 내 눈동자의 빛이기도 하였지만 그의 눈동자의 빛이기도 하였다. 항상 고개를 돌려 마주쳤던 색깔이었다. 한참동안 나는 거울 속의 내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에서 무엇인가를 기억해 내려고 노력을 하였다. 하지만 빛이 비슷할 뿐이었지 그의 눈동자의 색깔이 완벽하게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하질 못 하고 있었다. 맺힌 상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머리카락을 쓸어 이마를 내놓고 표정을 찌푸려 보았다. 그 분위기가 어떤 분위기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거울 속의 나는 생각보다 아주 빈약했다. 거울 속의 나는 나를 누르지 못하였고 내가 올려다보도록 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나와 같은 거리만큼 떨어져서 똑바로 응시하게 하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분위기는 흩어졌다. 진짜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다리는 점점 거울에서 멀어졌다. 아직도 거울에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도 나를 따라 시시각각 변했다. 하지만 상의 모든 것이 변할 때 변하지 않았던 한 가지는 그와 내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던 빛이었다.


 그와 함께 파랗다는 단어가 부서져 내렸다. 그 파편 속에서 드러난 것은 우울이라는 단어였다. 가라앉은 어감은 속에 날카로움을 숨기고 있었다. 그 빛깔을, 그 색깔을 바라볼수록 점점 나에게 다가오는 날카로움도 커져 갔다. 닫힌 창가의 수국 디퓨저의 향은 어느새 방 안에 가득했다. 색깔과 향기가 점점 나를 감쌌다. 그렇게 잊었던 감촉이 조금씩 돌아오는 듯 했다. 입술 위에 겹쳐졌던 다른 입술, 그리고 목에 가 있던 손가락. 감각이 살을 타고 돌아왔다. 그는 나에게 스킨이냐고 물어 보았었다. 나는 그렇다고 대답했고 그는 그러냐고 대답했다. 손을 뻗었다. 막대를 타고 얹힌 수국은 그 자리에 있었다. 손가락에 향기가 묻어 나왔다. 어느새 얼굴을 감싼 손은 눈앞을 깜깜하게 하였다. 그리고 난 마침내 머릿속에 그 때의 그를 그려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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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폭발

2017. 6. 4.

 “제발 그러지 마시라니까요!”

 

 코왈스키의 목소리가 결국 올라갔다. 그는 속으로 아차, 했으나 말을 물리기엔 뻔히 보이는 심한 부상이 버티고 있었다. 그러자 스키퍼는 표정을 바꾸며 팔짱을 꼈다.

 

나한테 왜 화를 내는 건가?”

화 안 냈습니다.”

그게 화낸 게 아니라고? 왜 소리를 지르는 건데?”

소리를 지른 것도 아닙니다! 전 단지-”

아니야. 자네 의도가 어땠었는지 간에 나한테는 그게 화를 내는 걸로 받아들여졌네. 나도 이제 더 있으면 목소리 올라갈 것 같으니까 그만해.”

? 아니, 전 화를 낸 것이 아니라 이 일도 저희 때문에 대장님께서 혼자 처리하겠다고 바꾸신 것에 대해서 제발 그러지 마시라고 이야기한 것뿐이잖습니까!”

이것 봐, 또 목소리 올리지. 나한테 이야기해 봤자 소용없네. 이제 와서 바꿀 순 없어. 난 갈 거니까-”

대장님! 지금이라도 철회하면 되지 않-”

 

 코왈스키의 말은 스키퍼의 손에서 막혔다. 이런 종류의 실랑이는 결국 무력으로 끝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코왈스키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는 돌아간 고개를 숙이며 다녀오시란 말만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스키퍼는 손목시계를 확인하곤 자켓을 손에 든 채로 소리를 내며 걸어 나갔다. 현관문은 꽝 소리를 내며 닫혔다. 스키퍼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속에서 무언가가 끓어오르고 있었지만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한 번씩 이렇게 만류와 독단이 부딪히는 싸움이 날 때마다 알 수 없는 미안함이 남곤 했다. 언제나 그의 부관을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는 데에 쓰이는 그의 손은 쓰일 때마다 그에게도 후회를 남겼다. 하지만 네 명분의 위험은 혼자서 감수하는 것이 나았다. 사실 언제쯤 돌아올 수 있을지, 돌아올 수는 있을지 걱정이 되기도 하였지만 그가 이 일을 하겠다고 나선 이상 이 문제는 회피할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서 코왈스키는 굉장히 못마땅해 하고 있었다. 하지만 스키퍼는 부하들을 다치게 하고 싶진 않았다. 항상.


 코왈스키는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방금 전 자신의 목소리 톤이 올라갔던 것을 후회했다. 조금만 감정을 컨트롤했어도 이렇게 서로 기분을 상하게 만들지는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 문제는 대장과 부관이라는 직책 사이에서 끊임없이 끓어오르던 문제였다. 그것은 항상 대장만의 생각이었다. 네 명분의 부상은 혼자서 감당하는 것이 훨씬 나은 처사라는 것. 리코와 프라이빗은 둘째 치고 당장 코왈스키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나마 이번 일은 아주 위험한 일이었기에 그 이유가 타당해 보이는 것처럼-언제까지나 타당해 보이는 것처럼이었다-이야기가 끝났지만 그러지 않을 때에도 대장의 보호정신은 언제나 빛이 났다. 하지만 며칠 밤을 새고 돌아온 스키퍼는 항상 어딘가를 크게 다쳐 왔다. 뺨을 맞고서야 스키퍼는 보낼 수 있었던 코왈스키는 그 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가슴이 너무나 아팠다. 왜 우리는, 왜 나는 저걸 막을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되지 못할까. 그는 언제 다시 정상적인 대화를 시도할 수 있을지를 가늠해보며 팔에 고개를 묻었다. 그 전에 그가 새야할 밤이 며칠이나 될 지도 예상이 잘 되지 않았다. 그렇게 코왈스키는 첫 번째 밤을 샜다.


 그 후 나흘은 리코와의 신경전이었다. 항상 그랬듯이 리코는 이번에도 스키퍼가 없는 기지를 잘 버텨내지 못 했다. 어찌어찌 임무를 수행하고 오고, 본부의 일을 해 나가고 저녁이 다 되어 돌아오면 대원들은 다 힘이 빠져 있었다. 계속 불안감을 주체하지 못하던 리코의 엄지손톱은 조금만 더 있으면 피가 날 것처럼 보였다. 프라이빗은 붕대를 들고 왔지만 코왈스키는 고개를 저었다. 붕대는 리코에게 천조각밖에 더 되지 못하였다. 대장의 부재는 항상 예상만 해 오던 그의 빈자리가 크다는 것만을 더 절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결국 그 마지막 밤에 훌쩍이는 소리가 터져 나왔고 코왈스키는 또 목소리를 올릴 수밖에 없었다. 제발 그만 좀 해! 네가 그런다고 대장님이 지금 바로 오실 것 같아? 이것도 순간적인 폭발이었다. 리코의 눈빛은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 먹을 수 있을 것만 같은 눈빛이었다. 하지만 리코는 코왈스키에게 어떤 행동을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항상 이럴 때만 그는 리코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옳은 소리만 하곤 했었다. 두 사람이 험악해지면서 프라이빗은 어쩔 줄 몰라하였다. 결국 리코와 프라이빗이 지쳐 소파에서 잠들고 나서 코왈스키는 커피를 마셨다. 철제 컵은 오늘도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뻗어 컵을 닦았다. 오늘 밤엔 오실 수 있을까. 비틀거리는 걸음걸이는 오늘도 잠을 자지 않으면 내일은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듯하였다. 결국 카페인은 그를 포기하였다. 코왈스키는 핸드폰을 쥐고 소파 옆의 의자에 주저앉듯 앉았다. 스키퍼한텐 머리까지 딱 들어가는 등받이가 그에게는 머리 하나만큼의 허공을 남겼다. 기지는 탁상의 램프를 제외하면 어두웠다. 오늘만큼은 돌아오셔야 할 대장님은 아직도 오시지 않았다. 코왈스키는 눈을 감았다. 언제쯤 이 기다림이 끝날 수 있을까. 내일은 본부에 가서 작전파일을 보아야겠다. 오늘도 언제쯤 정상적인 대화를 다시 시도해 볼 수 있을까 생각을 했는데······. 그는 독단을 고집하는 스키퍼가 미워졌다. 하지만 그가 미워질수록 걱정도 커졌다. 이 감정은 또 언제쯤 폭발할까. 기다리는 것은 늘 힘들고 지쳤다. 그리고 때맞춰 울린 전화벨은 그 폭발의 도화선 역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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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Attract

2017. 5. 28.

 글자와 그림으로 설명된 자기력은 그에게 익숙했지만 이런 종류는 익숙하지 않았다. 물론 그의 손가락도 서로 강하게 붙는 자석 사이에 끼어본 적이 있었고 극을 잘못 맞추어 서로 밀어내는 자석을 붙이느라 진땀을 뺀 적도 있었다. 그만큼 그에게 N극과 S, N극과 N극 또는 S극과 S극 사이의 관계는 명확했고 눈에 보이는 것이 다였다. 그것에 그의 감정에게까지 영향을 주는 일은 없었다.

 지금은 그 말을 취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석이 평소에도 달라붙던 성가신 녀석을 완전히 붙어버리게 한 꼴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폭발 후의 결과가 이렇게 될 수 있을까. 자신이 그동안 들인 시간을 생각하면서 그는 최소한 이보다는 좋은 상황이 되었어야 한다고 속으로 말을 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그의 서글픈 생각들도 이미 발현된 극의 성질을 바꿀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자신과 대장 사이에선 척력이 작용한다는 사실과 리코와 대장 사이에선 인력이 작용한다는 사이었다. 어떻게 바꿀 수가 없는 일이었다. 이때만큼 과학의 기본적인 성질, 전자들 사이의 성질에 서글퍼질 수가 없었다.

 스키퍼가 코왈스키에게 그놈의 실험을 가지고 한바탕 화를 내고 난 후 그에게 떨어진 명령은 어서 평소 상태로 복구를 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좋지 못한 일은 저녁 식사를 할 때 일어났다. 리코는 아까 전에도 대장과 완전히 붙을 뻔 하며 서로 끌어당겨지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최대한 붙지 않으려고 조심을 하는 것 같았다. 물론 그 이유에는 스키퍼와 코왈스키의 반쯤 강제인 눈치가 있었다. 그러나 식사를 하다가 하필 소금 통과 가까운 자리에 앉았던 리코는 스키퍼의 요리가 조금 싱거운 것 같다는 소리를 듣고 말았다. 그는 아주 자연스럽게 셰프의 기질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리코의 팔이 스키퍼 쪽으로 뻗어지는 순간 둘은 마치 마법처럼 서로 붙어버리고 말았다. 리코와 스키퍼도 당혹스러운 표정이었지만 코왈스키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거의 울고 싶어졌다. 이 일이 생기고 나서 앞으로 다시는 실험하다 폭발을 일으키지 않겠다고, 휘발성 물질은 실험할 때 쓰지도 않겠다고 그렇게 결심을 하였던 자기 자신은 어느새 앞날 따위는 잊고 현실을 탓하고 있었다. 왜 하필 리코와 대장님이 서로 다른 극이었던 것일까. 프라이빗은 두 사람의 어깨를 각각 잡고 떼어내 보려고 노력했지만 그는 막내였다. 코왈스키는 자신이 건드릴 수 없는 상황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결국 스키퍼는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을 커피로 진정시켜야 했다. 평소처럼 코왈스키가 컵을 건네려 팔을 뻗자 스키퍼-그리고 스키퍼와 붙은 리코-는 점점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들의 발은 자의로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코왈스키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내 자신이 대장과 같은 s극의 성질을 띄고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다. 결국 프라이빗이 세 사람 사이에서 원치 않던 심부름을 하러 뛰어다녀야 하였다. 하루 일과는 끝났지만 잘 시간에 다다라 커피를 새로 마신 스키퍼 덕분에 리코는 그날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날 스키퍼와 같은 침대에서 잠을 잘 리코의 생각에 속이 타는 코왈스키가 밤을 샌 덕분에 다음날 아침에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이야기하는 코왈스키를 볼 수 있었다. 여전히 코왈스키가 한 걸음 가까이 갈수록 스키퍼와 리코는 한 걸음 멀어졌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코왈스키의 실험실에 들어갔고, 또다시 펑 하는 소리가 났다. 이 자석에 관련된 문제가 해결되야만 하는 소리였다. 폭발음 뒤에 연기가 자욱했다. 그리고 밖에서 지켜보던 프라이빗의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았다. 코왈스키는 정말, 대장님의 말을 빌리자면, ‘제대로 만든 발명품이 없었다.’ 리코는 저만치 날아갔고 이번엔 대장과 코왈스키가 붙어 있었다. 서로 붙은 팔을 떼려 하다가 전날 리코와 같은 상태로 코왈스키가 자신의 옆에 있게 된 것을 안 스키퍼의 분노 섞인 손을 멋쩍게 웃던 코왈스키는 피하지 못했고 그의 뺨에는 반나절 내내 붉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인력과 척력에 관한 이야기는 아직도 네 남자를 진절머리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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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왈스킵 장미

2017. 5. 14.

거리 사이로 빨간 꽃이 피어났다. 몇몇은 일찍 핀 탓에 꽃잎이 벌어져 잘 보이지 않는 암술과 수술을 보이고 있기도 하였다. 그러나 한창 피어나는 꽃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것은 꽃은 그저 식물의 성장 단계에 불과하다고 말할 것 같이 생긴 사람에게도 아름다움을 전했다. 한 장 한 장 겹친 꽃잎 가득히 새겨진 붉은 빛에 자신의 이름을 가져다 붙인 색깔은 누가 보아도 5월에 잘 어울린다고 할 만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날 대장이 매었던 붉은 넥타이가 생각 외로 잘 어울렸다는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멈춰 선 발걸음은 어느 꽃집의 담장을 타고 덩굴손을 뻗은 장미의 앞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좋아하는 꽃을 굳이 꼽아보라고 한다면 붉은 장미라 말할 수 있겠다고 항상 생각해 오던 그였고 장미의 계절이 돌아왔을 때 그의 눈길을 빼앗은 것 역시 붉은 장미였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꽃집의 아가씨에게 다발이 얼마인지를 물어보고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그의 손엔 분홍빛 포장지로 곱게 싸인 장미 다발이 들려 있었다. 누군가가 보면 꼭 데이트를 신청하러 가는 연인과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는 다발을 어찌하지 못했다. 기지의 대장은 꽃을 보더니 어디에 놓을 거냐고 물었다. 놓을 것이 아니라는 말에 그는 그렇다면 어떻게 처리하려고 그만큼이나 샀냐는 말을 꺼냈다. 코왈스키는 다발을 슬슬 뒤로 숨기기 시작했다. 아니, 저는. 박자를 뗀 말은 끝맺지 못하였다. 붉은 장미가 무얼 뜻하는지, 그리고 그 다발은 또 무엇을 뜻하는지 자신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리고 꽃말은 지금 그의 감정에 붙은 꼬리표가 되었고 그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이 느낌을 표현하는 기호 역시 붉은 빛을 띨 것이었다. 그는 쓴 마음을 삼키면서 다발에서 한 송이만을 빼내어 긴 꽃병에 꽂았다. 꽃집 앞을 지나는데 오늘이 로즈데이라고 하더군요. 대장은 의외로 그 말에 수긍하는 눈치를 보였다. 그리고 장미 한 송이는 삶에 같이 있어 주어서 감사하다는 뜻이라고 했고요. 그는 한 송이가 빠진 다발을 뒤로 돌렸다. 한 송이의 뜻이 새로 생겼고 그것은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 중 아주 약한 의미만을 담고 있었다. 감사하다는 것. 그것은 예사롭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대장은 가시를 다듬은 줄기 끝에 매달린 붉은 꽃을 보고 표정을 부드럽게 하였다. 알겠네. 그리고 대화는 끝이 났다.


 코왈스키는 방문을 닫았다. 포장지와 리본으로 정성스럽게 싸였던 다발은 장미 한 송이만큼의 빈틈을 내보이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다발이라고 말하기엔 부족한 꽃들이었다. 그는 리본을 풀고 싸여져 있던 종이를 펼쳤다. 눈앞에 장미가 쏟아졌다. 장미향이 진하게 풍겼고 그는 그 속에서 대장의 붉은 장밋빛 넥타이가 너무도 확실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넥타이 선을 타고 올라간 위에는 파란 눈동자가 있었다. , 어쩜······. 내가 어떤 꽃이든 의미를 두지 않고 드릴 수 있었다면. 책상 위에 흐드러진 장미 꽃잎이 꼭 하트를 닮은 것 같았다. 그리고 그 꽃잎 하나하나에는 그의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이젠 쏟아졌고 잘게 흩어졌다. 그렇게 로즈데이가 끝나갔다.






A single red rose is given to say thank you for being in life. A bunch of red roses is given to express true love without which one cannot 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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